끝내 이창호만 남았고, 이창호가 나왔다. 당연히 누구나 12년 전(2005년) 6회 농심신라면배에서 ‘5연승 신화’를 쓴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을 떠올렸을 터다. 그때 중국 기자는 이창호의 투혼을 보고 이렇게 찬탄했다. “한 사람이 지킨 문을 만 사람이 열지 못한다.” 팬들도 이창호 9단이 과연 예전처럼 기적의 연승을 다시 한번 보여줄 것인가, 큰 관심을 보였다.
그 옛날 농심협곡에서 대륙의 백만대군을 홀몸으로 막아내던 이창호가 지옥(지지옥션)문에서 다시 홀로 여전사들을 맞이하다. - 킬러의수담 (사이버오로 뉴스 댓글에서)
그렇지만 그를 에워싼 반상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는 7명. 조혜연·김신영·박지은·김혜민·김채영·오유진, 여기에 여자랭킹 1위 최정까지 7대1의 싸움. “이창호 9단이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서너 명이면 몰라도…” 앞선 판에서 웬만큼 버텨줄 것으로 기대했던 ‘9연승의 신화’ 서봉수 9단이 단 2합(두 판) 만에 무너지자 같은 여자기사인 이민진 8단조차 코너에 몰린 신사팀을 안타깝게 여겼다.
상하이 대첩에서 12년이 지났다. 전성기도 지났다. 돌파해야할 상대가 여자기사라 해도 이들의 실력이 이미 녹록치 않고 무엇보다 수가 많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에서 천하의 이창호라 한들 어찌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관운장이 5관(關門) 돌파를 하듯 이창호 9단이 7관의 ‘지옥(지지옥션)문’을 뚫기엔 너무 첩첩산중이었고, 첫번째 ‘조혜연 관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끈질기고 견고했다.
▲ 그 분이 오셨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부처'의 면모와 신산(神算)의 솜씨를 보여달라기엔 세월이 많이 지났다.
▲ 관심이 집중된 판인 만큼 대국장에 긴장감이 서렸다. 조혜연 9단이 먼저 와 기다렸고 대국 시작시간 5분 전쯤에 이창호 9단이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돌을 가렸고 앉았던 자리를 바꿔 앉았다. 이창호 9단이 흑을 쥐고 두었다.
“이창호 9단도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사람 한사람 최선을 다해서 둔다라는 생각으로 둬야 한다. 승부에 대한 부담을 버리지 못한다면 1승이나 2승밖에 못할 수도 있고 운이 없으면 1승도 못하고 질 수도 있다.” - 高句麗 (사이버오로 뉴스 댓글에서)
결국 부담감에서 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디 한번 힘껏 싸워보자는 조혜연 9단보다는 당연히 무조건 이겨야할 처지에 놓인 이창호 9단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바둑평론가 박치문 씨는 예전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의 1989년 응씨배 결승 최종국을 보고 이런 소회를 남겼다.
“보이는 힘(力)은 보이지 않는 힘(氣)만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은 고요함(靜)만 못하다. 삼라만상의 오묘한 조화(妙)는 고요함에서 나온다.”
반상에 강자의 프리미엄은 작용할지언정 기득권은 없다. 상대전적은 어디까지나 지난 과거의 기록일 뿐, 특히나 이창호 9단은 신예기사나 여자기사, 아마추어 선수 같이 ‘이겨야 본전’인 대결에서 평소 그답지 않게 부담스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결국은 부담감에 흔들렸고, 결론은 조혜연에게 졌다. 마지막 희망 이창호마저 속절없이 무너지며 숙녀팀의 12-5, 일방적인 스코어로 2017년 시즌이 끝났다.
▲ 어깨가 천근만근이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이창호 9단은 눈을 부볐고 더워했다. 앉자마자 바로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 묵상하는 모습이 아니다. 자주 눈을 꿈벅거렸고, 복기할 때 보니 관자놀이가 땀에 젖어 있었다. 썩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반집’의 그 분을 ‘반집’으로 돌려세운 그녀, 조혜연
9월4일 오후7시,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재개한 11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에서 신사팀의 마지막 남은 주자 이창호 9단이 여류팀 6번째 선수 조혜연 9단에게 264수 만에 백 반집패를 당했다. 중반 압도적인 국면을 구축하고서도 이후 안전운행을 거듭하다 ‘반집의 승부사’가 ‘반집’에 분루를 삼키고 말았다.
서로 아웃복싱을 구사한 바둑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격렬한 인파이팅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흑백의 돌들이 시종 몸을 맞대며 접전 양상을 띠었으되 기로에 설 때마다 형세를 좋게 본 이창호 9단이 추궁하기보다는 무난한 선택을 하면서 미세한 계가바둑으로 흘렀고 끝내 역전을 허용했다.
이9단과의 대결을 앞두고 역대전적 4전 전패를 의식한 조혜연 9단은 “이창호 9단에겐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내용도 번번이 좋지 못했다. 남은 대국에서 좋은 내용을 펼치겠다.”고 전의를 다졌고 당당히 접전을 펼친 끝에 우승을 매조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창호 9단은 지난해 만40세로 신사팀의 출전연령을 낮추면서 처음으로 지지옥션배에 참가하였으나 서봉수 9단이 초반 9연승을 몰아친 덕에 출전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고, 따라서 올해가 실질적으로 지지옥션배 첫 데뷔전이었던 셈인데 패점을 안고 말았다.
▲ 바둑판을 빼곡히 메운 바둑돌. 흑백의 경계를 지으니 반면 흑이 6집을 남기고 있었다. 덤이 안 나왔다. 딱 반집이 모자랐다. 가상의 반집은 때로 신기루와 같다가 이처럼 비수가 되어 나타난다. 숱한 승부사를 숱한 반집으로 울렸던 이창호가 오늘은 반집에 울었다. 격세지감. 이런 게 또한 승부.
11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은 (주)지지옥션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최하고 있다. 제한시간은 각자 15분에 40초 초읽기 5회이며 우승상금은 1억 2000만원이다. 3연승한 선수는 200만원의 연승상금을 받으며 이후 1승당 100만원의 연승상금을 추가로 받는다. 대회 총규모는 2억 4500만원이다.
▣ 신사팀 & 숙녀팀 출전선수
<숙녀팀> 최정·박지은·김채영·오유진·김혜민·김신영·조혜연 /권주리·김은선·김다영·박태희·문도원
<신사팀> 이창호·양재호·안관욱·김종수·노영하·이기섭·백성호·서무상·이성재·최규병·서능욱·서봉수
▲ 관심이 쏠린 대결인지라 평소보다 기자들도 더 보였다.
▲ 신사의 구두와 여성 샌들이 이렇듯 맞대고 수담을 나누는 풍경은 내년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이때는 신사팀이 등산화나 조깅화를 신고 와야할지 모르겠다. 엄청 분발해야할 터이니.
▲ 국후 승자인터뷰에 응한 조혜연 9단. 꾸밈없이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말한다.
- 오늘 대국 어땠나요? 언제 승리 확신했는지.
“사실 초반을 안 좋게 시작한 데다 계속 중앙에서 무리를 했고, 흑(이창호 사범님)이 유리하다고 보고 풀어주셨다고 해야 하나...초반에 흑이 승부를 걸어와도 좋을 국면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실전처럼 두신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 덕분에 계속 버티다가, 제가 더 엷기는 한데 어느 정도 집으로 따라가게 되니까, 덤이 있으니까 좀더 버티면 해볼만하다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중반 이후는 뭔가 그래도 느낌은 좋은 거 같은데 의심스럽더고요. 워낙 뚜벅뚜벅 두시니까. 게다가 마지막 반패 싸움을 두고 패감 착오로 반패 승부를 가정하고 있기도 했고요.”
- 숙녀팀의 우승을 결정지은 의미 있는 승리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이창호 9단에게 4연패를 당하다 처음으로 이긴 것이기도 한데...
“이 판을 앞두고 이창호 사범님의 최신 기보를 많이 놔 봤는데, KB바둑리그나 이세돌 9단과 둔 바둑을 보면서 이 분은 내가 맞둘 수 있는 레벨이 아니구나, 너무 잘 두셔서...그래도 가능하면 내가 버텨서 힘을 좀 빼 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일대일 대국이었으면 힘들었겠지요. 뒤에 6명이나 남아있는 여자선수들 때문에 부담을 가지셔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뒤에 버티고 선 여자선수들이 저한테는 힘이 됐고 이창호 사범님한텐 부담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100수 무렵 사이버오로 회원들의 승부예측은 8:2로 절대다수가 이창호 9단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초중반은 이9단이 주도권을 쥐고 갔다.
갈수록 숙녀팀이 강해져서 출발부터 너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격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자 주최사는 다분히 이창호 9단을 염두에 두고 신사팀의 출전 연령을 45세 이상에서 40세 이상으로 조정하면서까지 가세시켰다. 이창호 효과 덕이었을까. 지난해 신사팀은 서봉수 9단이 파죽의 9연승을 거두면서 이창호 9단까지 순번이 가지도 않은 채 우승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선수는 6명. 역대 5대5, 어쨌거나 서로 주거니받거니 5번씩 우승을 나눠갖는 균형을 이뤘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년 고루 승점을 올리는 숙녀팀에 비해 신사팀은 특정 한두 선수의 연승에 기대는 의존도가 심했고, 아니나 다를까 올해 서봉수 9단이 단 1승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자 맥없이 이창호 마지노선까지 밀려버렸다. 해서 다음 12기부터는 신사팀이 40대에서 2명의 기사를 선발하는 현재 엔트리를 4명으로 늘려야할 거 같다는 말이 나왔다.
“글쎄요, 서봉수 명인님이 더 버티셨으면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서명인님이 나오셨을 때 전 우리 숙녀팀이 우승할 확률을 30% 잡고 있었고, 따라서 내가 더 힘을 내야한다 생각했습니다. 신사팀의 연령을 더 낮춰야된다고 생각진 않지만 저희 소녀후배들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소녀들 또한 내년에는 더 강해질 테니까 그리한다 해도 더 불리해지지는 않을 거 같긴 합니다. ^^”
▲ 이세돌 9단과의 싸움에서도 두번 승리한 바(8패) 있는 조혜연이다. 일찍이 박지은 9단과 더불어 루이 나이웨이 9단을 협공했던 무서운(?) 여전사다.
▲ 바둑 두는 여성이 아름답다. 오늘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조혜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