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삼각이 돼 버린 기분! (최원용 4단 vs 박영훈 9단)

○최원용 4단vs ● 박영훈 9단 백1과 3이 좋은 수다. 아니, 그냥 좋은 수가 아니다. ‘엄청나게’ 좋다. 감탄을 하고 있자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두 손으로 괴고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렇게 좋은 수야?” “엄청.” “나만큼 좋아?” “장난하지 마. 아마도 흑은 백3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흑4는 어쩔 수 없다. 〈복기1〉의 흑1로 치고 싶지만 백2에 흑은 3으로 이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8까지 흑이 곤란하다. 패가 날 모양이 됐지만 본래 흑집인 곳에서 생사패가 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백7까지 흑 요석 석점을 잡게 돼서는 백이 크게 우세한 바둑이다. “날이 점점 더워지네.” 그녀가 손을 들어 옆머리를 슬쩍 넘기자 하얗고 조그만 귀가 드러났다. 한때 영혼과 바꾸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귀였다. 지금은 박제가 돼 버린 과거의 기억에 불과하지만. 흑10으로 좌상귀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전단을 구하고자 함일 것이다. “쯧쯧…. 백13이 바둑을 공연히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군. 〈복기2〉 백1로 찝었으면 쉬웠을 텐데.” “백5까지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유리한 형세니까 이 정도면 충분했을 거야. 백이 우세를 계속 지킬 수 있지.” 백19까지 바둑은 머리가 아파졌다. 그녀가 얼음이 반쯤 녹은 아이스커피 잔의 뚜껑을 열고는 시럽을 넣었다. “그쪽도 넣어줄까?” “아니, 사양하겠어.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러고 보니 요즘 체중이 2㎏ 가까이 늘었다. 몸 구석구석에 기름기가 낀 느낌이다. 이럴 때는 내 자신이 빈삼각이 돼 버린 기분이 된다. 〈김영삼 7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