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이미 역전이 돼 있다. 중반까지 내내 흑이 앞서 나갔으나 지금은 반대로 백이 좋다.

“송구스럽게도 승부수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라도 그러할 만한 일이다. 나라도 승부를 걸었을 곳이었다.”

100 수가 넘어 비세를 느낀 제자는 승부수를 던져 보았으나 스승의 철통 같은 수비에 막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적어도 이 바둑에서만은 세월이 스승을 훌쩍 비켜 가고 있었다.

흑1로는 〈복기1〉의 흑1로 느는 것이 그럴싸해 보인다. 만약 이 흑1이 선수가 될 수 있다면, 즉 백이 2로 받아만 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흑9까지 백 전체가 잡힌다. 물론 바둑은 대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흑1에 백은 a로 따낼 것이다. 이것은 보다시피 패. 문제는 흑에게 팻감이 없다는 것이다.

흑7로 나가 9로 끊은 것이 제자의 마지막 버티기였다. 사실은 곱게 던질 곳을 찾았다고 보는 쪽이 옳다.

백12를 본 제자가 깨끗하게 돌을 던졌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옆에 앉아 있던 동자가 반상에 흩어진 돌들을 쓸어 담으려 하자 제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냥 두어라. 내가 하마.”

실전 흑11에 백이 〈복기2〉의 1로 끊으면 큰일이 난다. 바둑은 그대로 역전이다. 그러나 실전은 백12가 선수가 돼 이것이 안 된다. 제자가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그냥 가려느냐?”

스승은 제자를 만류하지 않았다. 부르는 곳도, 갈 곳도 많은 제자였다. 늙은 스승의 말벗으로 붙들기엔 너무도 커버린 제자인 것이다.

스승의 처소를 나선 제자는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붉은 노을이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일도, 어김없이 세상은 맑겠군.”

죽립을 깊이 눌러쓴 사내는 천천히 석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62수 끝, 백불계승

<김영삼 7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