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1이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눈길을 돌려버린다. 흑2에 3도 마찬가지.

면목이 없겠지. 사실 이 수는 좀 무리이다.

하지만 이해하기로 했어. 솔직히 지금 바둑은 흑이 좋으니까. 백으로선 무리를 감수할 수밖에.

자! 이제 흑4를 두었다. 뜨끔할 것이다. 백도 이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터.
이후 백은 최강의 버티기로 나왔다. 이래서 싸움이 시작됐다.

나야 일개 돌에 불과한 존재라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싸움을 기피하고 싶어 하는 쪽은 아니다.

흑이 18로 나왔을 때 백이 19로 이은 것이 실수였지. 한 마디로 문제의 수야. 왜인가는 <복기1>을 보면 답이 나오지.

무조건 백1로 막았어야 했어. 흑2 · 4에는 백3 · 5로 조이는 거야. 어때 실전보다 괜찮지? 실전은 뭔가 백이 엉성하잖아.

어차피 백이 불리한 싸움인데 백19가 덜컥수라 상황이 더욱 악화됐어.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백의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었군. 그러기에 주인을 잘 만났어야지. 쯧!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고, 주인을 잘못 만나면 하인이 괴로운 법이다.

백23. 바둑이 다 끝난 후 대국자들이 얘기하더군. <복기2> 백1로 젖혔어야 했던 게 아니냐는 거지. 하지만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어. 흑2를 당하면 백은 3으로 젖혀 삶을 구해야 하는데 흑6 언저리가 선수가 된다는 게 아프지. 백이 괴로운 전투가 되거든.

오늘 이영구가 상당히 호조야. 얼굴 잘 생겼지, 바둑 잘 두지. 성격도 좋지. 아주 참한 청년이라구.

물론 오늘 돌을 잘 만난 것도 복이겠지. 싸우는 족족 상대가 밀려나니, 이런 날은 정말 바둑 둘 맛이 나지. 그러고 보니 스튜디오 안이 좀 덥군. 어디 시원한 녹차라도 한 잔 해 볼까?

<김영삼 7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