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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 이야기② ‘반집’을 도입한 사연

[바둑상식]


덤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1938년 일본의 마지막 세습 본인방(本因坊) 슈사이(秀哉) 명인의 은퇴기에 나설 기사를 뽑는 대회에서였다. 이때 적용된 덤의 크기는 4집. 이전까지의 관례는 상수가 백을 쥐고 하수가 흑번으로 두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세계 최초의 기전이라할 제1기 본인방전이 탄생하면서 덤 4집의 제도가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반집이란 가상의 수치를 도입한 연유가 재미있다.

당시 모 기사 둘이서 대국료를 더 타내기 위해 사전에 승부를 담합하고 빅(무승부) 바둑을 만들었다. 여기서 그쳤으면 꼬리가 잡히지 않았을 것을 두 사람은 재대국에서조차 또 빅을 만들어버렸다. 이를 수상히 여긴 주최측에서 철저히 수사한 결과 담합을 밝혀내고 일본기원에 강력히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기원은 대국자들을 크게 힐책하고 백배사죄한 후 재재대국을 벌이게 했는데, 일이 우습게 되려고 그랬는지 이번엔 진짜로 우연찮게 무승부가 나와버린 것이다. 승부를 반드시 가리기 위한 ‘반집 개념’은 이를 계기로 도입되었다.


▲ 바둑을 마치고 계가를 하니 백이 31집, 흑은 38집이 나왔다. 흑이 7집을 이겼지만 백에게 덤 6.5집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경기결과는 흑 반집 승이다. 아슬아슬 간발의 차로 이겼다.

무승부 바둑을 막기 위해 덤에 가상의 수치 '반집'을 덧붙여

세습제가 아닌 현대기전을 처음 만들게 되면서 38년 덤 4집을 선 보인 일본은 여기에 무승부 방지용 ‘반집’을 덧붙였고(덤 4집반), 그러다가 61년 요미우리신문이 명인전 출범을 계기로 덤의 크기를 ‘덤 5집에 비길 경우 백승’으로 상향조정했다. 그리고 74년 제30기 본인방전에서부터 덤 5집반 시대를 열었다. 덤 1집반이 플러스되는 데 무려 38년이 걸렸다. 현행 덤 6집반을 채택한 것이 2002년부터니까, 덤 한 집이 늘어나는 데 다시 2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왜 덤은 고정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바뀔까. 바둑에 대한 수법이 축적되고 발달하면서 그만큼 흑을 쥐고 두는 쪽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둑계의 김구라’로 불리는 김성룡 9단이 “프로는 한 집이면 마누라도 바꾼다"고 너스레를 떨만큼 프로에게 한 집은 큰 것이다. 오죽하면 ‘한 집이면 땅을 보고 한숨 쉬고 두 집이면 하늘을 보며 통탄한다’ 했을까.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바둑선진국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덤 변천사도 일본의 흐름을 답습했다. 56년 동아일보가 최초의 한국 프로기전인 국수전을 만들면서 일본을 따라 덤 4집반을 적용하였다. 그렇지만 ‘익사이팅(exciting) 코리아’답게 덤 5집반을 공식기전에 적용한 것은 우리가 일본보다 1년 빠르다.

일본이 덤 5집에서 5집반으로 과감히 조정하지 못하고 주춤주춤하는 사이 우리나라는 73년 1월 대한일보사가 백남배를 창설할 때 바로 덤 5집반을 채택했다. 백남배는 당시 우승상금 50만원으로 최대기전이었다. 그리고 25년 뒤 98년 5월, 제3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덤 6집반을 전격 채택함으로써 덤제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때까지 통계로 보면 덤 5집반에서 흑의 승률은 54% 정도로 백보다 앞섰다.) 일본, 중국을 꺾고 세계바둑 최강국으로서 올라선 한국바둑이 산정에서 포효하는 백호마냥 자신에 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증표다. 일본은 4년 뒤(2002년) 슬그머니 6집반 덤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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