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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기적’ 한국 현대바둑 70년 약사 (동영상 첨부)

[바둑상식]


2015년은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두어 오던 순장바둑(흑과 백 각 8점씩, 16점을 포석하고 둔 바둑)을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는 현대바둑으로 대치하기 시작한 지 70년이 된 해다. 우리나라 현대바둑의 원년을 조남철 선생이 해방을 맞은 1945년 남산 자락에 한성기원을 세운 때로부터 잡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현대바둑은 광복 70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과 궤를 같이 한다.

바둑은 중국에서 발원해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과 한국은 포석단계에서 요처에 미리 돌을 배치하고 두는 바둑을 고수한 반면 가장 나중에 바둑을 도입한 일본은 빈 바둑판에 첫점부터 자기 의지대로 착수하는 자유포석제 바둑으로 발전시켰다. 이를 ‘현대바둑’이라 명명해 구분하며, 오늘날 우리가 두고 있는 바둑을 말한다.

일본이 계승, 발전시킨 현대바둑은 이미 사오백 년의 역사를 쌓은 데 비해 우리나라에 현대바둑이 보급되기 시작한 지는 7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불과 50년도 안돼 1990년대 세계를 제패하고 이후 20년 가까이 최강국으로 군림하는 놀라운 행마를 보였다.

한국의 현대바둑 70년을 ‘위대한 여정’ ‘기적의 궤적’이라 평하는 까닭이다. 현대바둑 70년을 결산하고 다시 미래바둑 70년을 여는 기점에 간략하게 되돌아보는 ‘한국 현대바둑 70년!’


현대바둑 70주년 기념 동영상 ‘꿈의 궤적’ | 한국기원 제작]





문(門)은, 열면 출구이지만
닫은 채로 두면 벽일 뿐이다.



1. 현대바둑의 개척기(1945~1970) : 조남철-김인 시대

1945년, 모두가 해방의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바둑판을 메고 대중 속으로 들어간 스물두 살 청년이 있다. 바둑이 한갓 잡기로 취급되던 시절, 청년은 바둑으로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노국수를 중심으로 순장바둑이 두어지고 있었지만 대중성과 장차 국제화를 내다본 청년은 자유포석제인 현대바둑 보급에 앞장섰다.

청년의 이름은 조남철!
이 땅에 현대바둑의 씨를 뿌린 그를 우리는 ‘현대바둑의 아버지’라 부른다.

“왜 우리는 일본보다 못 사는가? 우리에게 전문가가 부족한 탓이다. 각 분야에서 전문가가 많이 나와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 나는 바둑을 전공해 프로기사가 됐으니 바둑으로써 나라에 보은하겠다.” - 조남철


▲ 만년의 조남철 9단이 서울 남산동에 자리했던 한성기원의 옛터를 찾아 당시를 회고하는 모습. 한국에 현대바둑을 보급하기 위해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던 터전이다.

1945년 11월, 남산자락에 세운 한성기원은 한국기원의 모태이자 현대바둑의 출발지였다.

1948년 한국 프로대회의 효시인 1회 전국위기선수권대회가 열렸고, 1949년 최초의 아마추어대회인 전국선수권대회가 열렸다.

1950년 6월20일부터 일주일 동안 한국전쟁의 포화가 코앞에 닥칠 때까지 치른 3회 전국위기선수권대회는 단위결정시합을 겸한 대회로, 비로소 프로의 단위체계를 도입한 출발점이었다.
이때 ‘국수’로 불리던 13명의 노국수가 초단 단위를 받아들이면서 한국바둑은 명실상부한 통합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서 실력이 출중했던 조남철은 3단에 올랐다.

전쟁은 한순간 모든 것을 앗아갔어도 바둑에 대한 열정까지 앗아갈 수는 없었다.
1954년, 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창립되었다.
한국 현대바둑의 제2의 출범이었다.

이 해 4월 한국기원은 1회 승단대회를 개최했고, 6월에는 1회 입단대회를 열었다. 첫 입단의 영예는 김태현이 차지했다.

1955년은 한국바둑이 전쟁의 상흔을 씻고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해다.
3월 최초의 국제대회인 1회 한-대만 위기교류전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도 관심을 보인 대만과의 교류전에서 조남철, 김봉선이 주축이 된 한국은 16대8로 압승을 거둬 국민의 사기를 북돋웠다.
첫 바둑월간지인 <기도>가 창간되었고, 최초의 바둑단행본인 <위기개론>이 출간돼 바둑보급에 일조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956년, 동아일보가 국수제1위전을 만들었다. 현 국수전의 전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기전이다. 초대 국수에 오른 조남철은 이후 9기 연속제패하며 독주시대를 구가했다.


▲ 우리나라 첫 프로기전 ‘국수 제1위전’의 탄생 순간. 1965년 명동 동사무소에서 국수 제1위전(국수전의 전신) 첫 대국을 앞두고 당시 출전한 국수급 기사들이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앉아있는 사람이 조남철이다. 조남철은 1기부터 9기까지 국수를 제패하는 등, 60년대 중반까지 한국바둑 일인자로 군림했다.


▲ 철옹성 같던 조남철시대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연 기사는 김인이었다. 1966년 제10기 국수전에서 조남철의 10년 연속 제패를 저지하고 국수에 오르면서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김인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1971년 1월에 열린 제15기 국수전 도전4국 모습. 왼쪽 대국자가 김인 국수, 오른쪽이 국수 탈환에 나섰던 조남철이다.

1960년대는 혁명의 시대. 바둑계도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조남철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스물세 살 청년 김인이 20년 조남철 아성을 무너뜨렸다. 1966년 제10기 국수전에서 조남철의 10기 연속 제패를 저지하고 새 국수에 오르면서 김인시대를 선언한 것.

김인은 이후 세 번에 걸친 조남철과의 리턴매치를 모두 이기며 6년간 국수를 제패했고, 역시 조남철을 밀어내고 오른 초대 왕위를 7기 연속하는 등 한국바둑 일인자 자리를 굳건히 다졌다.

1960년대는 신문기전뿐 아니라 바둑잡지 창간과 단행본 출판 등 바둑문화적으로도 싹을 틔운 시기였다. 1965년 최초로 TV기전이 탄생했고, 한국기원은 1967년 8월 월간『바둑』지를 창간해 바둑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11월5일, 종로 관철동에서 염원하던 한국기원 회관건립 기공식을 가지며 한국바둑의 관철동시대를 열었다. 이날 조남철은 축사를 하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22년 간 무려 열여섯 번의 이사 끝에 마련한 바둑회관, 이를 기화로 한국기원은 1970년 4월 사단법인에서 재단법인체로 바꾸고 또 한번의 비약을 꿈꾼다.


▲ 한국바둑의 중흥기를 이끈 쌍두마차. 조훈현은 한국 국내에서, 조치훈은 바다건너 일본에서 일인시대를 구가하며 바둑붐을 일으켰다. 사진은 1980년말, 일본 명인 타이틀을 따고 귀국한 조치훈을 기꺼이 공항에까지 나가 마중한 조훈현. 두 기사는 반상에선 승부를 양보할 수 없는 라이벌이었지만 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함께 한국바둑의 위상을 견인한 영웅이었다.

2. 현대바둑의 성장기(1970~1990) : 조훈현-조치훈 시대

197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바둑은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드는 듯했다. 윤기현과 하찬석 같은 도일기사들이 떠오르며 김인시대를 흔들었다. 먼저 윤기현이 72년 16기 국수전에서 김인에 도전해 3-2로 이기고, 뒤를 이어 여섯 살 후배 하찬석이 국수를 양위 받았다.

도일 유학파만 있었던 게 아니다. 혜성 같이 등장한 ‘순국산 기사’ 서봉수의 명인 등극은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4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조남철을 3-1로 꺾고 명인을 땄을 때가 나이 열아홉, 입단 2년차 2단에 불과한 신인이었다.

하지만 ‘한국바둑의 봄’은 천재 조훈현이 병역의무차 귀국하면서 단막극에 그쳤다.
조훈현은 74년 14기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3-0으로 제치고 첫 타이틀을 딴 이후 1980년 전 기전을 죄다 휩쓸며 1차 전관왕에 오른 데 이어 82년과 86년 세 차례나 전관왕을 차지하는 15년 일인 장기집권시대를 이어간다.

특히 89년 1회 응씨배 우승은 변방국 취급을 받던 한국바둑의 위상을 일거에 뒤바꾼 분기점이자 단숨에 세계최강국으로 올라서게 한 도약대였다. 조훈현은 한국바둑의 실력과 위상을 견인한 것뿐 아니라 내제자 이창호를 키움으로써 국제경쟁에 대비한 공로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한국바둑이 최정점에 올라서던 날. 1989년 9월5일 싱가포르에서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를 제패하며 초대 '바둑황제'에 등극했다. 한국바둑사를, 바로 이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쾌거였다. 터닝포인트였다.

역사에 남을 위대한 승부사에게는 서로를 끊임없이 자극제하는 멋진 라이벌이 있다.
서봉수는 5판을 두면 한두 판을 건질 정도로 조훈현에게 밀렸지만 승부의 갈기를 세운 숙명의 맞수였다. 87년 조훈현의 국수 11연패를 저지하며, 30년 동안 일본 유학파 기사들만이 차지해오던 국수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는 압권이었다.

국내무대에서는 조훈현에 가려 만년 2인자란 소리를 들었어도 특유의 승부근성으로 93년 2회 응씨배를 제패했으며, 97년 5회 진로배에서 9연승 신화를 쓰는 등 국제무대에서는 한국바둑 4인방의 한 축으로 혁혁한 성적을 냈다.

70~80년대 한국바둑의 중흥을 이끈 영웅은 바다 건너 일본에도 있었다. 여섯 살에 일본에 건너가 80년 스물넷에 명인에 오르며 일본바둑을 제패한 조치훈은 바둑계를 뛰어넘어 전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부심을 드높인 바둑영웅이었다.

국내에서는 조훈현이 이끌고, 해외에서는 조치훈이 바둑붐을 쌍끌이한 데 힘입어 현대바둑 도입 50년 만에 세계를 평정하는 황금기를 맞는다.

3. 현대바둑의 황금기(1990~2015) : 이창호-이세돌 시대

1990년대는 한국바둑이 세계최강국으로 우뚝 선 황금기다. 조훈현이 한국바둑을 최강의 대열로 견인했다면 그가 키운 제자 이창호는 한국바둑을 독보적인 강국으로 우뚝 세워놓았다. 이 시기 세계최강의 사제를 원투펀치로 보유한 한국바둑은 서봉수, 유창혁이 가세한 4인방 진용을 내세워 세계대회를 휩쓸었다.

‘바둑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를 조훈현이 첫 우승물꼬를 튼 이후 4회까지 16년 동안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가 돌아가며 독차지하였다.
후지쯔배에서는 98년 11회 대회부터 2007년 20회 대회까지 10연속 우승기록을 세웠고, 이 과정에서 한국기사끼리 벌인 결승전도 여덟 번이나 연출했다.

특히 93~94년, 1회 진로배를 시작으로 이 기간 8연속 세계대회 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세계 천하통일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바둑의 승승장구는 새천년에도 이어져 2000년 8월12일 조훈현이 창하오를 이기고 후지쯔배를 석권했을 때부터 2003년 7월7일 이세돌이 후지쯔배에서 우승했을 때까지 무려 세계대회 20연속 우승, 이 가운데 메이저 세계대회 14회 우승이라는 놀라운 우승퍼레이드를 펼쳤다.

한국은 세계대회를 휩쓸기만 한 게 아니라 동양증권배, 진로배, LG배, 삼성화재배 등 세계대회를 속속 창설하며 세계바둑 중심국으로 자리했다. 해방되던 해 남산자락에 한성기원을 세우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 199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바둑은 20여년 동안 세계바둑대회를 휩쓸었다. 이 시기 중국과 일본은 감히 최강국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사진은 제3회 진로배 시상식(1995년, 3연패, 사진 위)과 1993년 세계 4대기전(응씨배, 후지쯔배, 진로배, 동양증권배) 제패 축하연 장면.

한국바둑의 황금기를 이끈 주장은 ‘철의 수문장’ 이창호였다.
89년 열네 살에 KBS바둑왕전을 우승하여 국내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운 데 이어 93년에는 불과 열여섯 살의 나이로 3회 동양증권배를 제패하며 최연소 세계챔피언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창호는 하늘이 한국바둑에 내린 선물이었다.

이창호는 스승 조훈현과 국제무대에서 더없는 콤비플레이를 펼쳤지만 국내무대에서는 일인자 자리를 두고 바둑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5년에 걸친 공방전을 펼쳐야 했고, 이 ‘사제 백년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바야흐로 ‘세계가 이창호를 좇는 시대’를 만들었다.

조훈현에게 맞수 서봉수가 있었다면 이창호에게는 맞수 유창혁이 있어 더욱 강고해질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불린 유창혁은 서봉수가 그랬듯, ‘1등 못지않은 2등’이었다. 큰승부에 강한 면모를 보인 유창혁은 국내에서 이창호의 아성을 간헐적으로 공략하는 한편 93년 후지쯔배를 시작으로 96년 응씨배, 2000년 삼성화재배에 이어 2001년 춘란배와 2002년 LG배를 제패함으로써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조훈현-서봉수-이창호와 더불어 ‘4인방시대’를 형성한 유창혁은 한국바둑 황금기를 연 주역이었다.

한국바둑의 르네상스시대 도래로 95년 세계최초로 바둑TV가 개국했으며, 97년 명지대학교에서 세계최초로 바둑학과를 개설했다. 아파트단지마다 바둑교실이 넘쳐났고, 인터넷바둑사이트가 속속 등장하여 IT바둑강국을 선도하였다.

승부세계에서 변치 않는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것!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이창호 왕국이 새천년에 들어서며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통을 터치한 승부사는 오지 섬에서 올라온 이세돌이었다.


▲ 조남철에서 김인으로, 다시 조훈현을 거쳐 이창호에 이르러 세계 최강, 최고의 바둑위상을 정립한 한국바둑. 이를 계승하고 책임진 승부사는 비금도에서 올라온 이세돌(사진 왼쪽)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며 중국바둑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고, 이세돌의 바통을 이어받을 확고한 주자가 쉬 등장하지 않아 한국바둑은 고전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면한 과제다.

2001년 봄, 이미 국내 2관왕에 올라 있던 열여덟 살의 이세돌이 5회 LG배 결승전에서 천하의 이창호를 막판까지 몰아넣는 분전을 펼쳐 주목을 받더니 2년 뒤 다시 맞붙은 7회 LG배 결승5번기에서 3-1로 이창호를 눕히고 후지쯔배에 이어 두 개의 세계대회를 석권했다.

여전히 세계대회 4관왕의 위용을 자랑하던 이창호인 데다 그때까지 11번이나 치른 세계대회 결승5번기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는 무적함대였기에 충격파가 더욱 컸다. ‘쎈돌’ 이세돌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2002년 세계대회에서 거둔 첫 타이틀인 후지쯔배를 시작으로 이세돌은 매년 우승행진을 펼쳐 통산 17회 우승기록을 쌓았다. 통산 21회 우승을 거둔 이창호를 뒤쫓는 눈부신 성적이다.

이러한 이세돌의 시대도 승부세계의 급속한 세대교체 회오리에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시대를 맞은 바둑은 이미 국가간 경계가 무의미해졌고 국내 국외 기사 구분이 무색한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다. 70년대 초 잠시 ‘한국바둑의 봄’이 왔듯 2015년 현재 한국바둑은 박정환과 김지석으로 대표되는 후배세대들과 이세돌이 혼전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세계바둑계는 지난 세기보다 더 급격한 변혁과 치열한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다. 한국바둑은 그간 기예로 여기던 바둑의 정체성을 스포츠로 잡아 바둑보급 확대와 무한경쟁시대에 대비하고 있다.

2001년 스포츠로 전환하기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에 발맞춰 2005년 사단법인 대한바둑협회가 창설되었다. 2014년에는 바둑이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2015년에는 소년체전 종식종목으로 들어가 체육으로서 자리 잡았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금 3개를 모두 휩쓸며 국위선양을 톡톡히 했다.

70년 전, 이 땅에 바둑인구가 더도 말고 10만명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던 한 청년의 꿈이 1천만명 시대로 결실을 맺었다. 바둑변방국으로 대접받던 나라가 세계최강국으로 올라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 씨를 뿌렸고 누군가는 이를 키웠다. 앞으로 또 누군가 맺힌 열매의 씨를 수확해 세계만방에 한국바둑을 전파할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이러한 것이 기적이다. 광복 70년 만에 이룬 한국경제의 성과가 ‘한강의 기적’이라면, 광복 70년과 궤를 나란히 하는 한국현대바둑 70년은 ‘반상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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