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말하였다.

“묘한 곳에서 만났구나. 그간 잘 지내었느냐?”

제자는 묵묵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본시 말을 황금보다 아끼는 제자였다. 이를 아는 스승이 웃었다.

“세월이 가도 너는 마냥 제자리로구나. 세상이 왜 너를 두고 석불이라 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느니….”

동자 하나가 들어오더니 찻상을 내려놓고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제자가 다구를 들어 차를 우렸다. 맑은 차향이 방안을 채운다.

“차 솜씨는 늘었느냐?”

스승이 찻잔을 들더니 한모금을 맛있게 머금었다. 두눈을 감고 한동안 차맛을 음미하더니 이윽고 빙그레 웃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 맛이로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래돼 보이는 바둑판이 놓였다. 제자가 백1을 보고는 눈을 반짝인다. 제자가 흑2로 뛰니 스승은 백3으로 일립이전했다.

“어찌 보았느냐?”

스승의 물음에 제자가 무거운 입을 떼었다.

“보통은 〈복기1〉의 백1로 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흑은 2로 다가서게 됩니다. 백이 3으로 뛰는 것을 보아 흑4로 짚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정석인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흑2 자리가 워낙 크다고 보았다.”

백이 손을 뺀 만큼 실전 흑4가 아프다. 그러나 백도 5를 둘 수 있다. 3과 5는 능히 4와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

백이 7로 늘었을 때 흑이 8로 딴전을 부렸다. 무슨 이유일까.

“왜 받지 않았느냐?”

스승이 물었다.

“본시 〈복기2〉의 흑1로 받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백이 2·4로 젖혀 잇는 것이 큰 데다 약점 또한 남게 됩니다. 우상도 크지만 좌상이 더 크다고 보았습니다.”

<김영삼 7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