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국무총리배 현장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대표 드미트로 보가츠키(41)는 매우 친절하고 쾌활했다. 비록 전쟁이 장기간 길어지고 있지만 의외로 긍정적이었으며 약간의 여유도 느껴졌다. |
침략을 당해 7개월째 국토가 유린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부모·형제는 죽거나 흩어지고 삶의 터전은 미사일에, 또 로켓탄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노라”고 의연하게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내일 당장 포격을 받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피난 시설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침대에서 쪽잠을 청해본다는 게 그 참뜻이란다.
유럽 프로기사 아템 카차노브스키(올해는 유럽 팀 챔피언십 결승에서 프랑스를 꺾고 유럽 정상에 올랐다)를 배출한 우크라이나는 비록 바둑 인구는 적지만 진실로 바둑을 사랑하는 나라다. 전쟁의 공포와 혼돈 속에서 바둑이 혹시 작은 위안이 되고는 있지는 않을까….
이번 국무총리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출전 선수 명단을 보다가 하늘색과 노란색이 만난 국기가 눈에 띄었다. 경황 없는 시절에 한국으로 향해 수담을 청한 우크라이나 선수의 심경은 어떨까.
26일 평온한 얼굴로 2라운드 경기를 마친 드미트로 보가츠키(41) 아마6단을 만나봤다.
▲ 2라운드에서 한국의 김정선 선수와 대국하는 우크라이나 대표 드미트로 보가츠키.
▲ 대국 종료 후 복기를 하고 있다.
-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바둑은 언제부터 시작했고 현재 기력은 어떻게 되나?
1989년에 시작했으니까 30년이 넘은 것 같다. 9살부터 시작했고, 13살이 되던 1994년에 일본기원에서 1년 동안 바둑 유학을 했다. 현재는 EGF(European Go Federation) 아마6단이며 유럽에서 Top 3~40위 정도 되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 바둑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다.
- 어린 나이에 바둑유학이라니, 대단하다. 누구와 같이 갔고,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으며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고바야시 치즈 5단에게 배웠고, 일본기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또래학생 1명, 청년 3명과 같이 갔다.
- 일본 유학은 어땠나?
아주 좋았다. 기력에서 큰 진보가 있었다. 일본 가기 전에 3~4단이었는데 떠날 때는 5~6단 실력이 됐다.
- 어쩐지 오늘(26일) 대국한 한국의 김정선 아마7단이 "드미트로 보가츠키 선수의 실력이 생각 외로 강하다.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김정선 선수와 한 대국은, 초반은 괜찮았지만 이후에 실수를 했고 나중에는 이길 기회가 없었다(웃음).
- 좋아하는 프로기사가 있다면?
다케미야 마사키 9단, 고바야시 고이치 9단, 이창호 9단을 좋아한다. 최근 2년 동안은 일이 바빠서 요즘 바둑계의 새로운 소식은 접하지 못했다.
▲ “바둑을 둘 때는 전쟁조차 잊을 수 있다.”
▲ 드미트로 선수가 칠레의 라이제네거 레나테 선수와 3라운드에서 대국하는 모습.
- 인공지능으로도 공부는 하는지?
물론이다. 인공지능 카타고(KataGo)로 복기한다. 하지만 대국할 때는 인공지능 수법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고 최대한 내 실력에 맞는 수를 위주로 두려고 한다.
- 현재 직업과 거주하는 곳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며 영국의 IT회사에서 근무한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 거주하면서, 재택근무 형식으로 일하고 있다.
-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겪고 있다. 전황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가 지난 2월에 공격을 당한 이래 두 달간은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후로는 어떻게든 버텨냈다.
- 최근 뉴스를 보니 우크라이나가 오히려 승기를 잡고 있다고 하던데?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러시아가 많은 군대와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예측하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최근 러시아가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걸 비추어 봤을 때, 3~4개월에서 6개월까지도 전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 대국 종료 후 이유진 2단이 계가를 도와주고 있다.
- 러시아가 지난 2월 침공을 시작했을 때, 본인에게 어떠한 피해나 영향이 있었나?
물론이다. 첫 2주 동안은 키이우에 있었으나 그 이후에 가족과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키이우에서 남쪽으로 7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안전한 장소였고 그 곳에서 1달 정도 머물렀다. 러시아가 키이우에서 후퇴한 후에 다시 키이우로 돌아왔다.
-지금은 키이우가 안전한가?
안전하긴 하지만 러시아가 여전히 많은 무기와 미사일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00% 안전하지는 않다.
- 그 당시 상황은 굉장히 극단적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전쟁 발발 후 첫 2주 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일은 모두 팽개치고 뉴스만 계속 확인했다.
-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멘탈 관리를 했나?
개인적으로 전쟁 후 첫날은 재앙이었지만 두 번째 날부터는 국민들이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조금씩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 대국 결과표에 서명하고 있는 드미트로.
- 혹시 평소 바둑을 뒀던 것이 최악의 상황에서 희망을 찾는 데 도움이 됐나?
그 당시에는 바둑을 둘 수 없었다(웃음).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전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항복하려 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전쟁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대국할 때 항상 상대가 어떻게 둘지 예측하듯이 평소 바둑을 뒀던 것이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바둑을 두면서 오픈 마인드가 된 것 같다. 그동안 바둑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많은 나라들을 방문했는데 그러한 경험 덕에 이동에 대한 큰 거부감이 없어졌다. 만약에 전쟁 때문에 나라를 탈출해야 한다면 비교적 쉽게 결정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 새로운 장소로 가는 것에 뭔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 우크라이나 바둑계는 현재 어떤가?
수많은 바둑인이 나라를 떠나 피신했지만 지난달엔 전쟁 시작 이후 처음으로 오데사(우크라이나 남부의 최대 도시)에서 바둑대회가 열렸다. 바둑대회가 열릴 당시는 어느 정도 안전했지만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이 남아 있었다. 대회 참가 인원은 불과 7~8명 정도였고 벙커 같은 곳에 모여서 대국을 했다(웃음).
- 벙커에서 바둑을 뒀다니! 혹시 대국 중간에 러시아 군의 공습은 없었나?
공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은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에 설령 공습을 당했어도 대국을 계속 했을 것이다. 그 장소를 고른 이유도 안전했기 때문이다.
▲ 대국이 끝나자마자 검토실로 자리를 옮겨 복기를 시작했다.
- 지금도 공습을 대비하고 있나?
예를 들어 현재 키이우에서는 공습 경계경보가 울리면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웃음). 경보가 울릴 때마다 계속 대응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최근 3달 동안은 키이우에 직접 공격이 단 한번도 없었다.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 다른 우크라이나 바둑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많은 어린 선수들이 다른 유럽 국가로 피신해 있다. 한 예로 작년 국무총리배에 우크라이나 대표로 참가한 오비센코 베스볼도(Ovsiienko Vsevolod, 14) 아마4단은 아직까지도 포르투갈에 머무르고 있다.
- 바둑의 최고 장점을 꼽는다면?
바둑의 최고 장점은 사람들을 연결해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항상 새롭고 배움에 끝이 없다(웃음). 그리고 바둑을 두는 순간 만큼은 바둑 이외의 것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다.
- 전쟁조차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나?
그렇다. 만약에 다른 걸 생각하면 바둑을 잘 못 두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1시간에서 2시간 정도는 모든 잡념을 몰아낼 수 있다(웃음).
- 바둑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트레이드(Trade:거래). 바둑에서는 항상 뭔가를 주는 대신 그 이상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안전하게 지내면서 전쟁이 하루빨리 마무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우크라이나가 현재 빼앗긴 영토를 다 되찾은 후 전쟁이 끝나길 바란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똑같이 희망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당신의 아파트에 누군가가 쳐들어와서 방을 빼앗으면 가만히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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